해외여행/독일(2023) - 완결

[독일 여행 2탄] Chapter 7-1 : 다하우 1부 - 다하우 강제 수용소

超지구여행자 2024. 3. 20. 16:46

Dachau

(다하우)

 

다하우는 바이에른(Bayern)주 오버바이에른 현의 도시이다.

 

뮌헨 근교에 있는 약 45,000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이다.

 

나치 독일의 최초의 강제수용소가 이 다하우에서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이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방문하기 위해 다하우를 찾는 편이다. 

 

다하우 관광 정보 : www.dachau.de


안내

강제 수용소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수용소 희생자들의 사진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라며, 보기를 원하시지 않을 경우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2023년 11월 30일 (목)

뮌헨 근교 도시 당일치기 여행은 이날이 마지막이었다.

목적지는 다하우, S반을 타고 가도 되고, RB(지역열차)를 타고 가도 무난하다.

 

다하우로 가는 열차 편수가 많기 때문에, 널널하게 갈 수 있다.

참고로 S반을 타면 23분, RB를 타면 12분이 걸린다.

다하우 중앙역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관광객들로 한창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보러 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726번 버스를 타면 강제 수용소까지 갈 수 있는데, 워낙 타는 사람이 많아 쉽게 찾을 수 있다.

 

◆ 다하우 강제수용소 기념관

다하우 강제 수용소 기념관에 도착 후 먼저 인포메이션 센터로 향했다.

가이드 투어를 신청하기 위해서였는데, 비용은 4유로로 2시간 30분 정도 진행된다.

 

나의 의견으로는 굳이 가이드 투어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든다.

먼저 장소가 넓기 때문에 가이드 분이 모든 부분을 다루거나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고

가이드 투어를 해도 세부적으로 둘러보러면 개인적으로 다시 둘러봐야 했다.

어차피 입장료는 무료이며, 전시물의 내용 설명도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오기 전까지 집결장소에 모여있는 사람들.

갑자기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가이드 분을 만나 그룹으로 돌아다니며 설명을 듣고 움직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원래 탄약을 생산하던 공장지대였다.

나치 독일이 1933년 이 공장지대를 수용소로 개조했고, 약 12년동안 악명을 떨쳤다.

거의 40,000 명 정도가 여기서 굶주림과 질병,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초기 용도는 나치 정권에 대항하는 반 정치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함이였다.

 

수용소와 함께 나치 친위대 Schutzstaffel(슈츠슈타펠) - "SS"의 건물이 함께 있었으며

나치 친위대가 상주하며 수감자들을 악랄하게 괴롭혔다. 

주어하우스(Jourhaus), 수용소의 입/출구 건물이다.

이 건물은 위병소 겸 군인과 장교들이 당직근무를 하는 곳이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Arbeit macht frei) 라는 문구가 철문에 새겨져 있다.

모순적이게도 이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노동의 댓가로 얻은 건 대부분 죽음뿐이었다.

참고로 현재 정문의 철문은 복제품이다.

원본은 도난당했다가 노르웨이에서(!!!) 발견되어 위 사진처럼 기념관 내에 보관되어 있다.

입구를 통해 들어오니 수용소 부지가 꽤 넓음이 체감이 된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점호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점호는 1시간 이상이 걸렸고, 날씨 여부를 상관하지 않고 진행되었다고 한다.

 

여기 있는 건물들은 유지보수용 / 수송 방 /  목욕탕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내부 형태는 남겨 놓고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용소에서는 범죄자, 유대인, 정치범 (사회주의자 등),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등

여러 이유로 사람들이 다양한 국적을 가리지 않고 수감되었다.   

2차 대전에서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들은 수감되지도 못하고 총살형으로 살해되었다. 

수감자들의 생활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 사이즈에 맞지 않는 옷을 지급받았으며 매일 고단한 노동을 해야 했다.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위 사진처럼 기아에 시달려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왼쪽 위 사진을 보면, 수감자들을 눕혀 놓고 매질을 했던 게 흔했던 것 같다.

 

오른쪽 사진은 수감자 별로 표식을 구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표식은 수감자들 사이에 일종의 위계질서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의도된 것이다.

수용소에는 학살이 흔하게 일어났다. 

고문은 기본이었고, 도망치려는 수감자들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서 사망했다.

SS들은 일부러 수감자들을 철조망 근처로 몰아 놓고 탈주로 간주해서 죽이기도 했다.

막사에서는 위 사진처럼 나무로 만든 3층 침대에서 수감자들이 생활을 했다.

1개 막사당 200명의 정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길어지며 수감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위 사진의 세면장과 변소를 보면 정말 열악하기 짝이 없음이 느껴질 것이다.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오솔길, 양쪽에는 경작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스실을 갖춘 화장터의 사진이다.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수용소의 수감자들도 많이 사망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 자체 화장터를 만들어 소각을 처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신들이 수레에 쌓여 시체더미를 이루었다고 한다.

원체 참혹한 비극과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곳이기 때문에

전쟁 이후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수용소 기념관 부지 내에는 수녀원, 교회, 러시아 정교회 예배당이 건설되어 있다.

 

눈이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와 수북히 내리는 눈이 수용소에서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말해주는 듯 했다.